- 입력 2026.10.04 11:06
7월 증시 급락에 한 달 만에 기금 평가액 9.7% 증발
자산재조정 미룬 결정에 커지는 책임론과 수익 방어 반론
국정감사서 기금 독립성 훼손 및 지배구조 개편 쟁점화

국민의 노후 자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이 지난 7월 국내외 금융시장 폭락장 속에서 한 달 만에 181조 원이 넘는 기금 평가손실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상반기 증시 활황기 동안 자산재조정(리밸런싱)을 한시적으로 미루고 국내주식 비중을 늘렸던 결정이 하락장에서는 오히려 거대한 충격을 그대로 흡수하는 부메랑으로 작용한 모양새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정부의 무리한 증시 부양 정책 동원 논란과 수익률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반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최근 공시한 7월 자산군별 포트폴리오 운용 현황과 국회에 제출된 통계에 따르면 7월 말 기준 국민연금 기금 적립금은 1,684조 1,730억 원으로 집계됐다.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던 6월 말 1,865조 5,760억 원과 비교하면 한 달 만에 9.7%에 해당하는 181조 4,030억 원이 증발했다.
손실의 핵심 진원지는 국내주식 부문이다. 6월 말 543조 2,040억 원이었던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평가액은 7월 말 418조 5,580억 원으로 124조 6,460억 원 줄었다. 연초 이후 107.37%까지 치솟았던 국내주식 누적 운용수익률도 7월 말 60.11%로 47%포인트 넘게 하락했다. 이는 코스피지수가 6월 말 8,470선 부근에서 7월 말 6,590선으로 22% 이상 폭락한 영향이 크다. 해외주식 역시 주요국 인공지능(AI) 투자 지속 가능성 우려와 기술주 조정 여파로 661조 원대에서 624조 원대로 약 37조 원 감소했고, 기금 전체의 누적 수익률도 6월 말 27.22%에서 7월 말 14.84%로 반 토막 났다.
시장에서는 이번 평가손실이 단순한 거시경제적 하락장 이상의 구조적 원인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보건복지부 산하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올해 1월 국내주식의 기계적 매도를 막겠다며 리밸런싱을 6개월간 한시 유예했다. 지난 5월 말에는 올해 국내주식 목표 비중을 14.9%에서 20.8%로 대폭 상향했다. 여기에 전략적자산배분(SAA)과 전술적자산배분(TAA) 허용 범위를 더해 최대 28.8%까지 국내주식을 보유할 수 있도록 열어줬고, 실제 6월 말 보유 비중은 29.1%까지 올랐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원칙대로 고점에서 주식을 분할 매도해 현금을 확보했다면 7월 하락장의 충격을 방어하고 저가 매수 기회로 삼아 변동성을 완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위험 노출도를 줄이지 않은 채 폭락장을 맞으면서 평가손실 규모가 180조 원대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는 것이다.
사상 초유의 기금 증발 사태를 두고 거센 외풍과 함께 책임 공방도 격화하고 있다. 노동∙시민사회계는 국민연금이 확립해 온 자산 배분 원칙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비중을 확대한 것은 정권 차원의 증시 부양 정책에 연기금을 도구로 동원한 위험한 시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와 재정경제기획위원회 소속 야당 의원들은 거시경제 왜곡을 막기 위해 장기간 유지해 온 국내주식 축소 기조를 무시한 정부의 결정이 국민 노후 자금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며 국민연금공단 책임론을 제기했다. 특히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도입 등 고위험 파생 상품군 확대로 기금의 변동성 노출이 심화했다는 의혹도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반면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와 기금운용위원회는 시장 상황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었다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 정은경 장관은 국회 회의에서 “주가의 변동성은 리밸런싱만 가지고 설명하기는 한계가 있다”며 유예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호히 선을 그었다.
정 장관은 기존 목표치인 14.9%를 고수했다면 상반기 국내 증시 상승세에 찬물을 끼얹고 폭발적인 수익 자체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7월 급락에도 불구하고 연초 이후 기금 전체 수익률이 14.84%로 여전히 견고한 성과를 방어하고 있다는 점도 근거로 내세웠다.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심화하는 국내 금융시장 왜곡과 향후 국민연금이 감당해야 할 시스템 리스크에 주목하고 있다. 세계 3대 연기금으로 커진 국민연금이 자산 배분 허용 범위를 자의적으로 조정할 경우 시장에 미치는 부작용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중순 취임한 최고투자책임자(CIO)인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이규홍 본부장은 훼손된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됐다. 이미 목표치를 훌쩍 넘어선 국내주식 비중을 향후 재정비 과정에서 국내 증시 충격 없이 어떻게 연착륙시킬지가 첫 번째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이번 사태는 다가오는 정기 국회 국정감사에서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국정감사에서는 ▲기금운용위원회 주요 회의록 공개 여부 ▲리밸런싱 유예 과정에서의 독립성 훼손 의혹 ▲시장 변동성을 완충할 독립적인 지배구조 제도화 방안 등이 집중적으로 다뤄질 예정이다. 글로벌 불확실성이 지속해서 이어지는 가운데 1,680조 원대로 내려앉은 기금의 위험 관리 체계 전면 개편 논의가 불가피해졌다.

